<편집자주>
'우리뉴스'는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박경만 전문위원(탐사전문 기자. 전 한겨레신문 선임기자)이 지난 15년 동안 DMZ 곳곳을 취재하며 이 지역의 역사, 생태, 사람들의 이야기를 촘촘히 엮어낸 DMZ 완벽 답사기 <두루미의 땅, DMZ를 걷다>를 매주 수요일 싣습니다.
박 전문위원은 서해바다 끝 백령도, 연평도에서 강화 앞바다의 섬들, 한강하구와 임진강·한탄강 유역, 그리고 강원도 산길과 동해안까지 접경지역 전체를 두 발로 걸으며 DMZ를 금단의 구역이 아닌 ‘부활의 땅’으로 살려내고 있습니다.
글을 싣는 순서는 1부 서해, 한강 이야기(서해 백령도에서 강화, 김포, 고양까지), 2부 임진강 이야기(파주에서 연천까지), 3부 강원도 이야기(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로 구성되며 앞으로 1년간 약 50차례가량 연재할 예정입니다.
양양에서 원산까지 동해 해안선을 따라 동해북부선 열차가 달린다. 1937년 12월 개통한 양양역은 남쪽의 종착역답게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목재와 석탄, 철광석, 수산물을 실어 나르며 번창했다. 일제는 철광석과 목재를 수탈하기 위해 양양 서쪽 산악지대인 장승리까지 7킬로미터 길이의 산업용 지선을 운영했다. 지금은 폐허로 변해 시멘트 잔해들만 흩어져 있다. 잔해를 따라 숲속에 들어가면 굵은 나무뿌리가 점령한 선로와 함께 숨어 있던 30미터 길이의 승강장을 만날 수 있다.
양양~원산 208.3킬로미터를 잇는 동해북부선은 1929년 안변~흡곡 구간을 시작으로 1937년 간성~양양 구간을 연결했다. 이 철도는 한국전쟁 발발로 개통 13년 만에 멈춰 섰고 1967년 폐선되었다. 개통 초기에는 20개 역이었으나 나중에 간이역을 포함해 정차역이 31개 역으로 늘어났다. 애초 계획은 남으로 강릉, 포항까지 내려가 동해남부선과 연결해 한반도 동해안 종단철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철도 연장공사는 중단되었다.
동쪽으로 망망대해, 서쪽으로 백두대간
양양에서 출발한 원산행 열차는 낙산사역과 대포역을 지나 속초에 다다른다. 해방과 함께 북한에 편입된 동해북부선은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의 병력과 물자 수송을 담당하면서 미 공군의 폭격 목표물이 되었다. 미 공군은 1950년 6월 29일 평양을 시작으로 북한 전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는데 철도, 정유, 조선소 등 북한 동부 산업시설이 밀집된 원산은 특히 심했다. 폭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과거 학교나 군대에서 성행했던 이른바 ‘대가리 박기’라는 가혹 행위를 ‘원산폭격’이라 불렀다. 원산 주민들은 폭격을 피해 동해북부선을 따라 남으로 내려왔는데 남쪽으로도 폭격이 이어져 속초역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워버렸다.
속초를 지나 북상하는 동해북부선 열차는 고성 송지호에 닿는다. 송지호는 둘레 6킬로미터, 평균 수심 5미터의 자연 석호로 호수 주변에 소나무가 울창해 송지호(松池湖)라 부르게 되었다. 석호(潟湖)란 바다였던 지역이 주변 지형 변화에 따라 바다로부터 분리되어 형성된 호수를 말한다. 민물과 바닷물이 섞인 송지호는 도미·전어·잉어·숭어 등 어종이 풍부해 청둥오리·기러기·고니 등 철새들이 쉼터로 이용한다. 송지호 해변공원에 동해북부선 철교 교각이 복원돼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송지호를 지나면 공현진 터널이 나온다. 수십 발의 총탄 흔적이 남은 터널 안 콘크리트는 지은 지 80년이 지났지만 이제 막 지은 것처럼 말짱했다. 공현진 터널에서 빠져나온 원산행 기차는 망망대해의 바다를 향해 돌진한다. “터널에서 빠져나온 열차가 바다 쪽을 향해 달리는데 마치 바다로 빠져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동쪽으로는 망망대해 바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이 펼쳐지는 동해북부선은 승객들에게 특별한 감흥을 선사했지요.” 『철도의 눈물』을 펴낸 철도기관사 박흥수 씨는 당시 승객들이 느꼈을 소감을 대신 전했다.
양양역과 비슷한 규모로 컸던 간성역과 화진포, 마차진을 지나면 초목이 우거진 숲 사이로 배봉리 터널이 이끼를 덮은 채 숨어 있다. 동해북부선 남쪽 최북단 터널인 배봉리 터널은 무성한 잡초를 발로 다지며 길을 내야 겨우 접근할 수 있다. 70년간 시간이 멈춰 원시 자연의 일부가 된 배봉리 철교 교각 터에는 남북 철도 연결을 염원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남으로도 북으로도 못가는 ‘제진역의 딜레마’
배봉리 터널을 지나 민간인통제구역에 동해북부선 남쪽 마지막 역인 제진역이 있다. 북한과 철도 연결을 위해 2006년 새로 만들어졌지만 남과 북 어느 쪽과도 연결되지 못하는 비운의 역이 되었다. 남한의 역이지만 북으로 가는 철로는 막혀있고, 남으로 가는 철로는 파괴되어 갈 수 없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제진역에는 국가 간 이동할 때 거치는 세관 검사, 출입국 관리, 검역 기능을 하는 동해선 철도 남북출입사무소(CIQ)가 설치돼 있다.
사라져가던 동해북부선의 기억을 되살린 것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남북출입사무소가 설치되면서부터다. 2002년 9월 18일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도로 착공식이 개최되었고 2006년 제진역과 철길이 완공되었다. 2007년 5월 17일 경의선 문산~개성(26.8킬로미터)과 함께, 동해선 금강산~제진 25.5킬로미터를 복원해 시험운행을 했다. 마침내 2007년 12월 11일 분단 62년 만에 문산~봉동 간 정기 화물열차가 개통되어 동해선도 기대를 크게 모았다. 하지만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 출범 뒤 남북관계가 급랭하면서 그해 12월 열차는 멈춰버렸다. 시험운행을 했던 열차는 2년가량 제진역에 머무르다 2008년 묵호항으로 끌려갔다.
금강산까지 4,000원, 20분이면 도착
1936년 식민지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건넌 두 명의 청년이 있었다. 점령국의 국기를 가슴에 달고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을 뛰어야 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이다. 올림픽을 두 달 앞둔 6월 4일 서울에서 출발한 두 청년은 신의주, 단둥, 봉천, 하얼빈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모스크바에서 유럽행 열차로 갈아탄 이들은 천신만고 끝에 7월 17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화물열차에 몸을 실은 식민지 청년의 아픈 기억은 이제 평화의 시대를 열어갈 꿈이 되었다. 남북은 2018년 판문점 선언을 통해 손기정이 이용했던 유라시아 대륙철도 연결의 불씨를 살렸다. 2022년 1월 제진역에서는 끊어진 동해북부선 구간인 강릉~제진(110.9킬로미터) 구간을 다시 잇는 착공식이 열렸다. 2027년 완공되면 부산에서 나진까지 1,295킬로미터에 걸친 한반도에서 가장 긴 종단철도가 완성된다.
제진역에서는 훗날 타게 될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미리 체험해볼 수 있다. 강원도교육청은 2021년 제진역의 폐객차를 개조해 ‘통일로 가는 평화열차(PTX)’ 체험장을 만들었다. 대합실에서 플랫폼으로 나가는 길목에 “려행하는 손님들 어서 오세요”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북한 땅에 들어온 착각이 들게 한다. 열차 겉면에는 금강산 28.26킬로미터, 베를린 1만 1,128킬로미터, 파리 1만 1,739킬로미터라고 적혀 있고, 열차 안에는 북한 승무원 복장을 한 안내원들이 북한 말투로 안내를 한다.
제진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 모스크바, 베를린을 거쳐 종착역인 런던까지 1만 2,754킬로미터를 달리게 된다. 런던까지 요금은 159만 원이고 12일이 소요된다. 북 강원도 금강산역까지는 요금 4,000원이고 20분이면 도착한다. 남북 관광교류의 상징인 금강산은 2008년 중단될 때까지 10년간 193만 4,662명이 다녀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니 철로가 다시 개통된다면 열차를 타려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으리라.
시베리아 횡단의 시작, 라선
금강산을 지나면 임진강의 발원지인 법동군 마식령이다. 마식령에는 2014년 10개 슬로프를 갖춘 스키장이 조성돼 외국인에 개방됐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한 스키선수들이 마식령에서 공동훈련을 했다. 마식령을 넘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원산 명사십리가 펼쳐진다. 남북 강원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원산은 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 다시 만들어졌다. 김정은 위원장의 고향으로 각별한 애정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원산 갈마지구 5.5킬로미터 해변에는 멕시코 칸쿤과 호주 골든코스트를 벤치마킹한 호텔 100개 동이 들어서 세계적인 휴양지로 떠오를 전망이다.
북 강원도에서 북상하여 흥남, 청진을 지나면 동해북부선의 종착역이자 북한의 국경도시인 라선이다. 1993년 라진과 선봉이 합쳐져 라진-선봉 경제무역지대가 되었다가 2000년 라선시로 개칭되었다. 두만강 하구에 자리한 라선철새보호구는 청천강 하구의 문덕철새보호구와 함께 2018년 북한 람사르 습지 1호로 등록되었다. 갈대밭과 습지로 나뉜 만포, 서번포, 동번포 등 3개의 호수에서 재두루미와 적호갈매기, 알락꼬리마도요, 혹고니 등 멸종위기종들을 만날 수 있다.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러시아와 3국이 국경을 맞댄 라선시와 두만강시는 2011년부터 중국 훈춘, 러시아 하산·슬라뱐카를 잇는 ‘3국 관광’이 추진되었다. 2016년에는 육로와 여객선을 이용해 훈춘~라선~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국제관광노선이 개통되기도 했다.
DMZ를 넘어야 갈 수 있는 미지의 세계
한반도의 끝 라선에서 시베리아 대륙으로 이어지는 길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다. 그곳에 대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기회의 땅이자 한반도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땅이 될 것이다. 그 땅은 DMZ를 넘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청년 손기정은 자신의 조국과 자신에게 영광의 월계관을 수여했던 베를린에 들이닥칠 분단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은 분단을 이미 극복했고 우리도 언젠가 극복하게 될 것이다. 그 시기의 길고 짧음은 지금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가 탄 열차는 여객용 기차가 아니라 군 장비 수송용 화물열차 같은 것이었다. 정규 여객열차 편은 일주일에 두 번밖에 없었고, 우리가 떠날 때는 시간이 맞지 않았다. 열차는 때 없이 멈춰 섰다가 예고도 없이 제멋대로 달렸다. 어떤 날은 종일 보리밭 사이를 달리다가, 또 어떤 날은 호수를 끼고 한없이 달리기도 했다.”(손기정,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중에서)
열차는 때 없이 멈춰 섰다가 예고도 없이 제멋대로 달린다. 분단을 넘어서는 일도 그러하다.
마음의 귀를 열고 들어보라. 보리밭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 웅장한 호수에 시베리아의 구름이 일렁이는 소리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림자를 보지 않으려면 빛을 보면 된다. 분단이 드리운 그림자에 벗어나지 못하고 침잠해 있을 것인가, 열린 미래의 대륙을 향해 열차를 달릴 것인가. 우리 앞에 선택이 놓여있다.〈끝〉
이상으로 "DMZ 500km두루미의 땅을 걷다 "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박경만 전문위원은
1993년부터 2023년까지 30년간 한겨레신문 기자로 일했다. 15년간 경기도 북부 DMZ 접경지역을 취재하면서 2019년 'DMZ 현장보고서'를 연재했고, 2021년 <DMZ 접경지역의 지속가능한 생태평화관광>이라는 주제로 경기대 관광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 유일의 분단 현장인 한반도 DMZ를 10여 년간 걸으면서 생태적, 평화적 가치를 알리는 다양한 탐사기록을 남겼다
정론직필 우리뉴스 후원하기
우리뉴스는 새로운 미디어를 지향하며 정론직필을 실천해 더 나은 언론 생태계를 만들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후원이 주변의 크고 작은 뉴스를 신속 정확하게 보도 하는데 큰 힘이 됩니다.
후원계좌 기업 / 132-118154-04-019 주식회사 우리뉴스